김일성과 박헌영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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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일 22-11-07 19:36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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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러한 관점은 부르주아지와 지주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으며, 동시에 민주주의, 사회민주주의, 혹은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것이었다.박헌영과김일성에관한 , 김일성과 박헌영인문사회레포트 ,
2) 조선 공산당 - 남로당
이 세력이 해방 공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정당 조직이 될 수 있었던 기반은 우선 지방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조직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, 둘째, 친일파 척결, 토지 문제 해결 등 민족적 assignment를 제기하여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일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동시에 이 세력의 정치적 노선이나 활동의 향배가 해방 후 한국사에 미치는 effect을 지대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. 이러한 입장에서는 민족통일전선 문제는 전혀 고려될 수 없었고, 민족적인 assignment가 절실한데도 극좌적 정치노선과 활동으로 치 닫을 수밖에 없게 된다 동시에 당면 goal(목표) 를 일제의 청산으로만 내걸고, 낙관적인 대미 인식을 하면서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方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선 공산당…(To be continued 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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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일성과 박헌영에 대한 글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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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일성과 박헌영
김일성과 박헌영에 대한 글입니다. 이는 당시의 정국에서 한민당, 국민당의 진보세력, 그리고 건준과 인민당의 대다수, 장안파 공산당을 배격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. 따라서 `8월 테제`는 코민테른 제 7 회 대회에서 강조한 통일전선 또는 인민전선의 형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. 이 테제는 조선공산당의 정세 인식을 나타내고 이후 조공 세력의 정치활동을 상당히 규정짓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. 8월 테제는 1928년 코민테른 제 6 차 대회의 결의와 `12월 테제`의 `계급 대 계급`의 노선을 이어받은 것으로, 한국에서의 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짓고 있다 그 내용의 核心은 토지의 국유화를 통한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이었다. 그리고 혁명의 과정은 2단계 혁명으로 일반 근로 인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`인민政府(정부)`가 점차 `노동자,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정권`으로 발전해 간다고 보면서, `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 확립`을 강조하는 것이었다.
박헌영이 조선 공산당을 재건하면서, 1945년 8월 `8월 테제`를 정치노선으로 하였다.